박물관에 갔다가 토기 전시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던 적 있으신가요? 저도 그랬습니다. 그냥 흙덩이 같은데 뭘 봐야 하나 싶었죠. 그런데 조금만 배경 지식이 생기고 나면 같은 전시실이 완전히 다르게 보입니다. 한국 미술사를 알고 나면, 역사가 이렇게 눈에 들어올 수 있구나 싶어집니다.

최초의 그림, 울주 반구대 암각화
경주나 서울 박물관에는 가도 울산 암각화는 그냥 지나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솔직히 처음엔 그냥 바위에 낙서 같은 게 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단순한 낙서가 아닙니다.
울주 반구대 암각화(巖刻畵)는 높이 4m, 폭 8m에 달하는 대형 선사 유적입니다. 여기서 암각화란 돌 표면을 깎거나 쪼아서 새긴 그림을 뜻합니다. 동굴 벽화처럼 안쪽 공간에 그리는 게 아니라 바위 절벽 자체가 캔버스가 되는 거죠. 한국은 화강암 지반이 많아서 유럽처럼 부드러운 석회암 동굴이 드물고, 그래서 동굴 벽화 대신 암각화가 발달했습니다.
이 그림은 1971년 동국대학교 조사팀이 댐 건설 과정에서 발견하며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그림 안에는 고래, 범고래, 혹등고래, 향유고래 같은 해양 생물부터 멧돼지, 사슴 같은 육지 동물, 그리고 사냥하는 인간의 모습까지 담겨 있습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갈수록 해양 생물에서 육지 동물로 주제가 옮겨간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학자들은 이를 수세대에 걸쳐 그림이 이어지면서 생활 방식 자체가 변해간 흔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제가 자료를 찾아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고래잡이 장면입니다. 혼자 잡을 수 없는 고래를 잡기 위해 여러 사람이 역할을 나눠 협업하는 모습이 그림에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수천 년 전에도 조직적인 분업이 있었다는 거, 생각할수록 놀랍지 않으신가요?
이 암각화는 현재 국보 28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불상은 왜 이렇게 다를까
삼국의 불상을 나란히 놓고 보면 누가 만들었는지 설명 없이도 느낌이 다릅니다. 저도 처음에는 다 비슷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출신지가 다 다릅니다. 비유하자면 같은 김치찌개라도 집집마다 맛이 다른 것처럼요.
고구려는 중국 북방의 유목 문화 영향을 받아 불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 불상들은 옷이 두툼하고 옷 주름이 많습니다. 추운 북방 기후가 불상의 의복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죠. 대표작인 연가 7년명 금동 여래 입상을 보면 옷이 몸을 꽉 감싸고 있고, 광배(光背), 즉 불상 뒤편에 두르는 빛을 형상화한 금동판의 문양도 강렬합니다.
반면 백제는 중국 남조, 즉 따뜻한 강남 지방의 문화를 수용했습니다. 그래서 백제 불상은 옷이 얇고 주름이 부드럽습니다. 납석 여래 좌상이나 규암 출토 금동 관음보살 입상을 보면 전체적으로 길쭉하고 곡선이 유려합니다. 배꼽을 기준으로 X자 교차하는 영락(瓔珞) 장식도 백제만의 특징입니다. 영락이란 금속이나 보석으로 만든 장신구형 장식을 말하는데, 백제 불상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신라는 불상에서 화려함보다는 인간적인 친근함을 추구했습니다. 금동 탄생불이나 금동 관음보살 입상을 보면 표정이 따뜻하고 현실적입니다. 불교를 늦게 공인한 탓인지, 신라의 불교 미술에는 절대자의 권위보다 현세적인 온기가 더 느껴집니다.
삼국의 불상 특징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고구려: 두툼한 의복, 강한 인상, 북방 유목 문화의 영향
- 백제: 얇고 부드러운 옷 주름, 유려한 곡선, 영락 장식
- 신라: 인간적이고 친근한 표정, 현세적 분위기
국보 78호와 83호, 두 반가사유상의 미스터리
박물관에서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앞에 멈춰 선 적 있으신가요? 저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이 두 작품을 처음 마주했을 때 한동안 자리를 못 떴습니다. 설명 없이도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었거든요.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란 한쪽 다리를 반쯤 접어 올리고 손을 뺨에 댄 채 생각에 잠긴 자세의 불상을 말합니다. 이 자세가 주는 정적인 긴장감이 보는 사람을 끌어당깁니다.
국보 78호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가고 굽혀진 두 손가락의 선이 마치 물결처럼 흐릅니다. 청동 특유의 색과 옷 주름의 흐름이 군더더기 없이 맞아떨어지는 불상입니다. 국보 83호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종교적 엄숙미와 절대자의 권위가 느껴집니다.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몇십 년간 철학자로 살면서 이 불상만큼 인간 실존의 평화로운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한 것이 단순한 수사가 아님을 직접 보면 알게 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두 불상이 백제 것인지 신라 것인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저는 이 미스터리 자체가 삼국의 문화가 그만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느 나라 것이든, 이 수준의 예술이 1500년 전 한반도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놀랍습니다.
경덕왕 시대, 통일 신라 미술의 정점
석굴암과 불국사, 성덕대왕 신종. 이름은 다 알아도 이것들이 같은 시대, 같은 왕의 시절에 만들어졌다는 걸 아는 분은 많지 않습니다. 통일 신라 35대 왕 경덕왕 시대가 바로 한국 고전 미술의 정점입니다. 미술사에서는 이 시기를 고전기(古典期)라고 부릅니다. 고전기란 한 문화권의 미적 기준이 완성되어 후대의 기준점이 되는 시대를 뜻합니다.
석굴암은 화강암 지반 때문에 굴착이 어렵자 인공으로 석굴 구조물을 지상에 세운 건축물입니다. 인도의 아잔타 석굴이나 중국의 둔황 석굴이 산을 파서 만든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입니다. 일본의 민속학자 요네다 미요지가 7년간 연구한 결과, 석굴암의 원형 주실 내접 정육각형의 한 변과 입구의 너비가 정확히 일치하며, 전실의 한 변으로 그린 정삼각형의 꼭짓점에 본존불이 위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서울대 물리학과 남천우 교수는 "깊이 조사할수록 실로 무서우리만큼 숫자상의 조화로 충만되어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성덕대왕 신종은 경덕왕이 선친 성덕왕을 기리기 위해 제작한 범종(梵鐘)입니다. 범종이란 불교 사찰에서 사용하는 종으로, 그 소리 자체가 불법을 전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771년 12월 14일이라는 정확한 완성 날짜가 종에 새겨진 명문으로 전해집니다. KAIST 이병호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성덕대왕 신종의 소리 아름다움을 수치화한 결과 86.6점으로, 2위인 보신각 종(58.2점)을 크게 앞섰습니다. 이 종은 내부가 울퉁불퉁하게 제작되어 맥놀이 현상이 발생합니다. 맥놀이란 서로 다른 주파수의 음파가 겹칠 때 소리가 규칙적으로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현상으로, 성덕대왕 신종 특유의 여운 있는 울림이 바로 여기서 비롯됩니다.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석가탑이 통일 신라 3층 석탑 양식의 전형을 완성한 작품이라면, 다보탑은 층수도 없고 유사한 형태가 한반도 어디에도 없는 이질적인 형식입니다. 같은 경덕왕 시대에 이 두 탑이 나란히 세워졌다는 것은, 고전 양식이 완성되는 동시에 그것을 벗어나려는 시도도 공존했다는 뜻입니다. 예술사적으로 굉장히 드문 순간이죠.
한국 미술사를 공부하기 전에는 경주 여행이 그냥 오래된 돌 구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같은 돌 앞에서 보이는 것이 완전히 다릅니다. 맥락을 알고 보면 석탑 하나도, 불상 하나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다음번 경주나 박물관 방문 전에 삼국의 불상 양식과 통일 신라 고전기를 한 번만 떠올려 보시길 권합니다. 같은 전시실이 전혀 다르게 느껴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