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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사 조선 초상화 (카메라 옵스쿠라, 이명기·김홍도, 조선 회화)

by siwoo-mom 2026. 5. 18.

한국미술사 조선 초상화

조선시대 초상화 중 키를 정확히 절반으로 줄여 그렸다는 기록이 단 하나 남아 있습니다. 1787년 이명기가 그린 유원호 초상이 그 주인공입니다. 처음 이 사실을 접했을 때, 저는 그냥 흥미로운 일화로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엔 단순한 기술 실험이 아니라, 조선 화가들이 얼마나 집요하게 '정확한 재현'을 추구했는지가 담겨 있었으니까요.

카메라 옵스쿠라, 조선 화가들이 이미 쓰고 있었다

유원호 초상 옆에는 작은 글씨로 이런 설명이 적혀 있습니다. 얼굴과 몸의 넓이와 길이를 실제 신체의 2분의 1로 줄여 그렸다는 내용입니다. 그림 속 인물의 키는 약 84cm로 표현되어 있으니, 실제 유원호의 키는 168cm였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조선시대 초상화 가운데 이렇게 구체적인 축척(縮尺), 즉 실물 대비 비율을 기록으로 남긴 사례는 이것이 유일합니다.

왜 이런 정밀한 기록이 남아 있을까, 그 답은 다산 정약용의 증언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정약용은 형인 정약전의 친구 이기양이 초상화 초본을 그리던 장면을 묘지명에 남겼는데, 거기서 등장하는 도구가 바로 칠실 파려아이, 즉 카메라 옵스쿠라(Camera Obscura)입니다. 카메라 옵스쿠라란 작은 구멍을 통해 외부 빛이 들어오면 어두운 상자 안 반대편 면에 피사체의 상이 거꾸로 맺히는 광학 장치로, 서양에서는 16세기부터 화가들이 정확한 소묘(素描)를 위해 사용하던 기구입니다. 쉽게 말해 렌즈도 없는 원시적인 카메라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정약용이 묘사한 장면이 생생합니다. 이기양이 마당에 앉아 카메라 옵스쿠라 앞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 꼭 흙으로 빚은 조각 같더라고 쓴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멈췄습니다. 장치 앞에서 굳어 있어야 하는 모델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던 화가의 집중력이 그 짧은 문장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이러한 서양 광학 기재 체험은 조선 후기 초상화 전반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카메라 옵스쿠라를 통해 얻은 정확한 비례 감각은, 이후 화가들이 얼굴과 몸의 접합부를 더 정밀하게 맞추려는 시도로 이어집니다.

이명기의 얼굴, 김홍도의 몸 — 서직수 초상이 보여준 것

조선 정조 시대를 대표하는 초상화를 꼽으라면 저는 망설임 없이 서직수 초상을 고릅니다. 얼굴은 이명기가, 몸은 김홍도가 그렸습니다. 당시 정조의 어진(御眞), 즉 임금의 공식 초상화를 제작하는 데 참여했던 두 화가가 한 인물을 함께 그린 셈입니다. 어진이란 왕의 권위와 통치 이념을 담는 국가적 회화 작업이었으니, 두 사람의 실력은 당대 최고로 공인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직접 서직수 초상을 오래 들여다본 경험이 있는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동파관(東坡冠)을 쓰고 도포(道袍)를 걸친 채 버선발로 선 그 인물이, 조선 초상화 중 가장 잘생긴 얼굴이라는 말이 과장으로 들리지 않았거든요. 김홍도가 표현한 비단옷의 의습선(衣褶線), 즉 옷주름의 선 처리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천의 질감과 무게감, 빛이 닿는 방향까지 느껴지게 합니다. 서양화법의 영향을 받아 명암을 입체적으로 구사한 결과입니다. 김홍도는 당시 도화서 화원 중 서양화법을 가장 능숙하게 활용한 화가로 평가받습니다.

이명기가 담당한 얼굴 부분은 또 다른 차원의 성취입니다. 그는 눈을 중심에 놓고 거기에 모든 초점을 집중시키는 방식으로 인물의 정신을 표현했습니다. 음영법(陰影法), 즉 빛과 그림자를 이용해 입체감을 만들어내는 기법을 얼굴 표현에 정교하게 적용한 것인데, 눈 주위의 미세한 굴곡, 콧날의 투영, 광대뼈의 음영이 모두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습니다.

서직수 초상에서 제가 주목한 또 다른 지점은 어깨와 목 부분의 수정 흔적입니다. 두 화가가 얼굴과 몸을 각각 그리다 보니 접합부에서 틀어진 부분이 생겼고, 그걸 실제 초상화 위에서 직접 고친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 수정 흔적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카메라 옵스쿠라 체험을 통해 정확한 비례 맞춤을 의식했던 흔적으로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서직수 본인의 반응입니다. 그는 자신의 초상화에 쓴 발문을 쓰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결국 "내 정신을 담지 못했다"는 취지의 말을 남겼습니다. 국가 최고의 두 화가가 합작한 작품에 만족하지 못한 것입니다. 저는 그게 과욕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신의 내면을 남이 완벽하게 담아낸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 수준의 그림에서 정신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그림의 문제가 아니라 보는 기준의 문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서직수 초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핵심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이명기의 음영법을 활용한 안면 입체 표현, 특히 눈에 집중된 정신성 묘사
  • 김홍도의 서양화법 기반 의습선 처리, 비단 질감의 사실적 재현
  • 얼굴과 몸의 접합부(어깨·목)에 남아 있는 수정 흔적, 정밀 비례 맞춤 시도의 증거

조선 초상화의 퇴락과 끝까지 살아남은 문인 정신

18세기 영조·정조 시대에 정점을 찍은 조선 초상화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뚜렷하게 쇠퇴합니다. 제가 직접 비교해보니, 그 차이가 생각보다 훨씬 분명하게 느껴졌습니다. 19세기 초에 제작된 조시 삼형제 초상을 보면, 선 처리가 눈에 띄게 굵어지고 딱딱해졌으며 얼굴의 미세한 입체감은 거의 사라집니다. 의습선도 같은 두께로 기계적으로 반복되어, 천의 질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마치 현대의 사진관에서 찍은 가족사진처럼 인물들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구성 자체는 근대적이면서도 표현의 깊이는 오히려 퇴행했습니다.

이 변화는 단순히 화가 개인의 실력 문제가 아닙니다. 조선 후기 사회 전반의 에너지가 빠져나가면서 예술을 지탱하던 지적·재정적 기반도 함께 무너진 결과입니다.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의 조선시대 회화 연구에 따르면, 19세기 이후 도화서(圖畵署) 화원 체계의 이완과 함께 초상화 제작 전반의 수준이 저하되는 경향이 확인됩니다. 도화서란 조선시대 국가 회화 사업을 전담하던 관청으로, 궁중 행사 기록화와 어진 제작을 총괄한 기관입니다.

그럼에도 이 시기에 도암 이재 초상처럼, 문인 정신의 용모를 정직하게 담아내는 전통이 완전히 끊기지 않았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저는 그 이유가 화가의 기술 수준보다는 태도에 있다고 봅니다. 조선의 좋은 초상화들, 그 뒤에는 반드시 대상 인물에 대한 화가의 진심 어린 경의(敬意)가 있었습니다. 돈을 받고 그린다는 사실을 잊을 만큼 그 인물 자체에 집중했던 화가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바로 조선 초상화의 정수입니다.

강세황의 자화상과 이명기가 그린 강세황 초상을 나란히 보면 이 차이가 더욱 명확해집니다. 이명기의 선은 유려하고 음영이 정밀하지만, 강세황이 스스로 그린 자화상에는 그만이 담을 수 있는 내면의 심상(心象)이 있습니다. 제 경험상 좋은 초상화란 기술과 공감이 동시에 작동할 때 나옵니다. 어느 하나만으로는 절반짜리 그림이 됩니다.

조선 초상화가 남긴 가장 큰 질문은 결국 이것입니다. 기술이 아무리 정밀해도, 그 사람을 진짜로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초상은 그저 닮은 그림에 불과하다는 것. 이명기와 김홍도가 합작한 서직수 초상 앞에서 그 질문이 가장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조선 초상화에 관심이 생기셨다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초상화들을 실물로 보시길 권합니다. 도판과 실물의 차이가 생각보다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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