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유영국의 그림을 보았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산인지 뭔지 알 듯 말 듯한데 자꾸 눈이 거기서 멈췄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바로 추상(抽象)의 힘이었습니다. 형태를 지워야 본질이 남는다는 믿음 하나로 평생을 버텨낸 화가, 유영국의 이야기입니다.

아무도 가지 않던 길을 먼저 선택하다
여러분은 스무 살에 "이게 아니면 없다"고 느낀 적이 있습니까? 유영국은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시절에.
1935년, 일본 도쿄의 문화학원에 입학한 유영국이 처음 마주한 것은 전위미술(前衛美術)의 세계였습니다. 전위미술이란 당대의 주류 예술 관습을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새로운 형식과 개념을 실험하는 예술 운동을 뜻합니다. 당시 서구에서 물밀듯 밀려오던 이 사조는 도쿄에서도 막 불꽃을 튀기고 있었고, 유영국은 그 한복판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자료를 살펴보면서 놀란 점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 많은 조선 화가들이 일본을 오가며 인상파(印象派) 풍의 구상화를 그릴 때, 유영국 혼자 순수 추상의 길로 방향을 틀었다는 사실입니다. 인상파란 빛과 색의 순간적 인상을 캔버스에 포착하는 사실 기반 화풍으로, 당시 조선 화단에서는 가장 세련된 선택으로 여겨지던 노선이었습니다. 그 안전한 길을 두고 유영국은 선, 면, 색채만으로 감동을 만들 수 있다는 쪽에 베팅했습니다.
그가 다녔던 문화학원은 당시 일본에서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웠던 교육 공간이었습니다. 외국인도 차별 없이 받아들였고, 교복도 없었습니다. 유영국이 이 학교를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경성제2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일본인 교사가 조선인 학생들에게 서로를 밀고하라고 강요하자 구타를 당하면서도 이를 거부하고 자퇴를 선택한 사람이었습니다. 억압을 견디느니 스스로 나오는 쪽을 택했던 그 태도가, 미술에서도 그대로 이어진 것입니다.
유영국이 1930년대 도쿄에서 참여한 자유미술협회는 일본 추상미술의 핵심 단체였습니다. 이 협회를 통해 그는 김환기와도 운명적으로 만납니다. 두 사람은 이후 한국 추상미술의 양대 산맥으로 나란히 기억되지만, 당시만 해도 그건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미래였습니다.
그림을 멈추고도 화가였던 시절
그림을 그리지 않는 화가가 여전히 화가일 수 있을까요? 저도 처음엔 이 질문이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유영국의 삶을 보면 그게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도쿄의 자유로운 공기는 사라졌습니다. 유영국은 귀국했고, 고향 울진에서 고깃배를 탔습니다. 그림 대신 바다를 택한 시절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는 양조장을 운영했습니다. 생계를 위해, 가족을 위해. 그러나 그 오랜 침묵이 그를 화가가 아닌 것으로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제 경험상, 무언가를 오래 하지 못하다가 다시 시작하면 처음보다 훨씬 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영국도 그랬습니다. 양조장을 정리하고 서울 약수동에 작업실을 꾸린 뒤, 그가 만들어낸 작품들은 전혀 다른 밀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곱 평 남짓한 작은 아틀리에에서 가로 160cm가 넘는 대형 캔버스를 채워나갔습니다. 마치 회사원처럼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출근해서 그렸습니다.
1964년, 나이 마흔여덟에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48년 인생의 첫 개인전. 당시 전시를 본 사람들은 "들어가자마자 뭔가 확 꽂히는 느낌"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묘사를 읽으면서, 그게 작품의 조형적 밀도(造形的 密度)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형적 밀도란 화면을 구성하는 색, 선, 면이 얼마나 긴장감 있게 맞물려 있는가를 나타내는 미술 용어로, 밀도가 높은 작품은 멀리서 봐도 에너지를 내뿜습니다. 유영국의 그림이 딱 그랬습니다.
유영국이 평생 사용한 기법의 핵심은 임파스토(Impasto) 기법이었습니다. 임파스토란 물감을 얇게 펴 바르는 대신, 두껍게 덧쌓아 올려 질감과 입체감을 만들어내는 회화 기법을 말합니다. 유영국은 한 층이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물감을 올리는 방식으로 화면을 쌓아갔습니다. 그 반복의 시간이 쌓여 저 묵직한 색채가 완성된 것입니다.
그의 작품이 얼마나 정교한지는 프랑스의 기가픽셀(Gigapixel) 프로젝트에 한국 작가 최초로 선정된 사실이 잘 보여줍니다. 기가픽셀이란 10억 화소 이상의 초고해상도 이미지를 의미하며, 이 프로젝트는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붓 자국과 물감의 결까지 디지털로 기록해 전 세계에 공개합니다. 프랑스 전문가들이 유영국의 색채가 고해상도로 볼수록 또 다른 감동을 준다고 평가한 것은, 그의 작업이 얼마나 촘촘하고 치밀했는지를 말해줍니다.
팔리지 않아도 멈추지 않은 색채의 일생
안 팔리는 그림을 수십 년 동안 계속 그릴 수 있을까요? 저는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영국은 했습니다.
그의 첫 그림이 팔린 건 1975년이었습니다. 화가로 데뷔한 지 약 40년이 지난 시점이었고, 나이는 이미 예순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아들에게 편지로 "아버지 그림이 팔렸다"고 흥분해서 전했을 때, 그 소식을 받은 아들도 유학 중이었습니다. 그 장면을 상상하면, 그 집에서 수십 년간 쌓아온 기다림의 무게가 느껴집니다.
유영국 본인은 그 시간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안 팔리니까 빨리 그릴 필요도 없었고,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생각할 수 있었다"고. 이 말이 제 경험상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결핍으로 볼 상황을 그는 자유로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한국 추상미술에서 유영국이 갖는 위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1930년대: 전위미술 그룹인 자유미술협회 참가, 한국인 최초 수준의 순수 추상 작업 시작
- 1960년대: 한국 화단에서 대형 추상 개인전 개최, 조형 언어 확립
- 1970년대: 산을 모티프로 한 서정적 추상 연작 시작, '산의 화가'로 불리기 시작
- 2000년대: 탄생 100주년 기념전, 파리 기가픽셀 프로젝트 한국 최초 선정
그가 60대 이후에도 심장박동기를 달고, 여덟 번의 뇌출혈을 겪으면서도 그림을 놓지 않았다는 사실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그에게 숨 쉬는 일과 같았다는 뜻일 것입니다. 실제로 그를 담당했던 의사가 무리하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국 추상미술 100년의 역사에서 유영국의 작업 연대기는 그 시작과 정점을 거의 혼자 커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한국 근현대 미술사 연구에서도 유영국은 단순한 화가가 아니라 한국 모더니즘(Modernism) 회화의 기점으로 다루어집니다. 모더니즘이란 전통적 형식과 재현 방식을 거부하고 새로운 예술 언어를 실험한 20세기 초반의 예술·문화 운동을 가리킵니다. 유영국이 1930년대부터 이 흐름을 직접 체험하고 귀국 후 한국 화단에 이식한 인물이라는 점은, 미술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재평가되고 있습니다.
유영국의 그림 앞에서 "이게 뭘 그린 거야?"라는 질문이 나오는 건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런데 그 질문을 오래 품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 형태가 아닌 에너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400여 점의 작품을 남기고 떠난 화가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아마도 그 에너지일 것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유영국의 원화를 실제로 마주해보시길 권합니다. 사진으로는 절반도 전달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