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를 공부하다 보면 "한국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은 인물을 자주 만납니다. 그런데 막상 그 사람의 이야기를 파고들수록, 단순한 '최초' 타이틀보다 훨씬 복잡하고 인간적인 서사가 숨어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고희동을 그냥 교과서 속 이름으로만 알았는데, 그의 생애를 들여다보니 예상보다 훨씬 입체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을사늑약이 바꾼 한 화가의 진로
1905년,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됩니다. 여기서 을사늑약이란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로 보호국화하기 위해 맺은 조약으로, 오늘날에도 그 강제성이 인정되어 '늑약', 즉 억지로 맺은 조약이라 부릅니다.
당시 고희동은 대한제국의 통역관이었습니다. 프랑스어를 정식으로 배운 몇 안 되는 엘리트였고, 황실 주변을 오가며 서양 화가들이 초상화를 그리는 장면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런 그가 을사늑약 이후 사직서를 냈습니다. 제가 이 대목을 처음 접했을 때 꽤 인상 깊었습니다. 단순한 실망이 아니라, 힘없는 나라의 공무원이라는 사실 자체가 부끄러워서 그만뒀다는 회고는, 당시 지식인들이 느꼈던 자괴감의 깊이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흥미로운 건 그다음 선택입니다. 나라가 기울어가는 상황에서 그는 오히려 '열강의 힘이 살아 있는 서양의 미술'을 직접 배우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단순히 미술이 좋아서가 아니라, 서양 문물이 가진 무언가를 이해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당시 개화파 지식인들이 공유하던 문명론적 위기감과도 맥이 닿아 있습니다.
도쿄미술학교와 양면의 시선
1908년 고희동은 일본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서양화과에 입학합니다. 도쿄미술학교는 오늘날의 도쿄예술대학 전신으로, 당시 동아시아에서 서양 미술을 가장 체계적으로 교육하던 기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그를 기다린 건 환영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처음 이 에피소드를 들었을 때 씁쓸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한국 친구들은 "나라가 망해가는데 무슨 그림이냐"고 비웃었고, 일본인들은 유화(油畫)도 본 적 없는 조선인이 서양화를 배우러 왔다며 이상하게 봤다는 겁니다. 여기서 유화란 건성유(乾性油)를 용매로 사용하는 서양화 기법으로, 당시 조선에서는 존재 자체가 낯선 장르였습니다.
양쪽 모두에게 어색한 존재였던 고희동은 그럼에도 학업을 이어갑니다. 그 결과 1914년 한국에서 발간된 잡지 청춘의 표지를 서양화 기법으로 그렸는데, 이것이 한국인이 그린 최초의 서양화로 기록됩니다. 안타깝게도 이 작품은 현재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의 졸업은 단순한 학업 완료가 아니었습니다. 한국인이 서양화를 정식으로 전공하고 졸업장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로서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귀국 후 마주한 냉담한 현실
1915년 고희동이 귀국할 무렵, 한국 신문에는 '미술(美術)'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합니다. 그의 귀국을 알리는 기사에서였습니다. 여기서 '미술'이란 회화, 조각, 공예 등 시각적 조형 예술 전반을 가리키는 개념인데, 이 단어가 생소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한국 사회에서 서양 미술이 얼마나 낯선 영역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귀국 후 그는 고등학교 미술 교사로 후학을 양성하면서, 1918년 서화협회(書畫協會)를 결성합니다. 서화협회란 서양화와 동양화를 아우르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미술 단체로, 공식 전람회를 개최하며 대중에게 미술을 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단체의 결성은 단순한 친목 모임이 아니라, 미술을 통해 민족 정체성을 지키려 했던 문화적 저항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지속적인 감시와 압박으로 서화협회는 결국 강제 해체됩니다. 그 와중에도 그의 자화상 세 점이 남아 있는데, 현재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서양화로 공식 인정받은 1915년 자화상은 국가등록문화재 제487호로 지정되어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고희동의 삶에서 저를 가장 놀라게 한 대목은 따로 있습니다. 그는 살아생전 자신의 유화 작품이 도쿄미술학교 졸업 작품 한 점뿐이라고 늘 단언했는데, 1972년 그의 자택 다락방에서 자화상 두 점이 추가로 발견되었다는 겁니다. 자신이 그린 그림을 잊고 있었다는 게, 어쩌면 그 시절 그가 감내해야 했던 심적 혼란의 크기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고희동이 야외에서 스케치를 나가면 엿장수나 담배 장수로 오인받기 일쑤였다는 당시 일화는, 서양화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인정받지 못했는지를 실감 나게 보여줍니다.
서양화에서 동양화로, 그리고 그 경계를 지운 작품들
해방 후 고희동은 1947년 전국문화단체 총연합회를 결성하며 다시 미술계의 중심으로 복귀합니다. 국전(國展), 즉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장을 1회부터 7회까지 연속 역임하며 한국 미술 행정의 핵심 인물로 자리 잡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으로 더 주목하는 건 그의 이 시기 작품들입니다. 정치에 잠깐 뛰어들었다가 환멸을 느끼고 돌아온 그는, 서양화가 아닌 동양화가로 복귀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동양화는 기존 주류였던 남종화(南宗畫)와는 결이 달랐습니다. 남종화란 중국 문인화의 전통을 이어받아 먹의 농담(濃淡)과 여백을 중시하는 화풍인데, 고희동은 이 대신 명나라 말기의 북종화(北宗畫)적 필치에 서양화의 원근법과 명암 처리를 결합한 독자적인 양식을 만들어냈습니다.
1947년에 그린 옥류봉도와 해금강도가 그 대표작입니다. 직접 보면 확실히 느낌이 다릅니다. 동양화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공간을 다루는 방식과 빛의 표현이 서양 풍경화에 가깝습니다.
그의 후기 작품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서양화의 원근법(遠近法)을 동양화 구도에 적용하여 공간감을 확보
- 북종화 특유의 강한 필선을 유지하면서도 명암 대비를 서양화 방식으로 처리
- 산수화의 전통 소재(금강산, 해금강)를 사실적 묘사와 결합
그런데 이 작품들에 대한 미술계의 평가는 생각보다 인색했습니다. 서양화도 동양화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라는 비판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그 평가가 다소 가혹하다고 봅니다. 두 화풍을 모두 체득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실험이었고, 그 실험의 결과물은 지금 봐도 독창성이 분명합니다.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이 융합 시도의 의의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나오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희동 한 사람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한국 근현대 미술사 전체가 보입니다. 을사늑약이라는 치욕에서 출발한 선택,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고독, 그리고 말년에 두 장르를 융합하려 한 도전까지. 그는 최초라는 기록보다 그 과정에서 훨씬 많은 것을 남긴 인물입니다. 그의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니, 기회가 된다면 직접 보시길 권합니다. 사진으로 보는 것과는 질감이 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