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화가를 꼽으라면 누구를 떠올리십니까? 많은 분들이 단원 김홍도를 먼저 말씀하시는데, 김홍도가 그 경지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겸재 정선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 겸재의 노년 작품을 마주했을 때 느낀 건 단순한 감탄이 아니었습니다. '이게 정말 300년 전 그림인가'라는 당혹감에 가까웠습니다.

중국 화풍을 베끼던 시절에서 진경산수화의 탄생까지
겸재 정선이 처음부터 독창적인 화가였을 거라는 생각은 사실과 다릅니다. 초기의 겸재는 당대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중국 화보(畫譜)를 충실히 따라 그렸습니다. 화보란 일종의 그림 교과서로, 당시 조선의 화가들은 창의성보다 정해진 도상을 얼마나 잘 소화하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호림박물관에 소장된 사계산수첩만 봐도 전형적인 중국 문인화풍의 흔적이 역력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겸재를 바꿨을까요. 결정적 계기는 36세에 두 차례에 걸쳐 다녀온 금강산 유람이었습니다. 그 전까지 조선의 산수화는 주로 관념산수(觀念山水)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관념산수란 실제 풍경을 보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이상화된 자연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중국의 북송·남송 화풍을 계승한 형태였습니다. 겸재는 금강산을 직접 발로 밟고 눈으로 확인하면서 '왜 우리 땅을 우리 방식으로 그리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의 시대적 배경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청나라를 오랑캐로 여기는 소중화(小中華) 사상이 확산되면서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서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졌고, 실학의 발달과 함께 금강산 기행문이 유행처럼 퍼졌습니다. 겸재는 이 분위기 속에서 등장했고, 사천 이병연이라는 시인 친구와 관아재 조영석 같은 동료 화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畫)라는 새로운 장르를 열어갔습니다. 진경산수화란 말 그대로 실제 경치를 직접 보고 우리 산천을 독자적인 필법으로 그려내는 방식을 뜻합니다.
겸재의 초기 금강산 그림은 회화식 지도에 가까웠습니다. 부감법(俯瞰法)을 활용해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구도를 취했고, 봉우리마다 이름을 꼼꼼히 표기했습니다. 부감법이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점을 그림에 적용한 기법으로, 넓은 지형을 한 화면에 담기 위한 방법입니다. 이 초기 작품들이 거칠고 도식적으로 보여도, 저는 이 시기에 이미 겸재가 남과 다른 무언가를 모색하고 있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화풍의 변화를 이끈 기법들, 그리고 50년간의 성장
겸재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려면 그가 사용한 몇 가지 핵심 기법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미점법(米點法)이 있습니다. 미점법이란 쌀알처럼 찍은 작은 점들을 반복해서 부드러운 흙산이나 초목을 표현하는 기법으로, 육산(흙으로 이루어진 산)을 묘사할 때 주로 쓰입니다. 반면 금강산의 날카로운 바위 봉우리에는 상악준(霜岳皴)을 사용했습니다. 상악준이란 서릿발처럼 날카롭고 수직으로 내리긋는 필선을 반복해서 암산(巖山)의 강렬한 질감을 표현하는 준법(皴法)입니다. 준법이란 산이나 돌의 질감을 나타내기 위해 붓을 쓰는 방법의 총칭입니다. 이 두 기법을 한 화면 안에 대비시키는 것이 겸재 진경산수화의 핵심 조형 원리였습니다.
관직 생활의 굴곡도 화풍 변화에 영향을 줬습니다. 42세에 관상감에서 일을 시작한 겸재는 3대에 걸친 과거 실패로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양반 자손임에도 중인 계급의 직업을 전전해야 했고, 생활고 속에서 하양 현감직을 얻은 것이 오히려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단양팔경의 도담삼봉과 하선암 등 우리 산천을 직접 사생(寫生)하기 시작했고, 진경산수화의 틀을 본격적으로 다져나갔습니다.
57세 청하 현감 시절에 그린 내연산 삼용추 그림은 제가 특히 인상 깊게 본 작품입니다. 역동적인 폭포와 힘찬 붓질이 마치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이후 어머니 사망을 전후해 5년간 화풍이 급격히 변하는데, 이 시기부터 겸재의 그림은 형상을 정확히 묘사하는 것보다 필묵(筆墨) 그 자체의 리듬과 에너지를 표현하는 방향으로 전환됩니다. 필묵이란 붓과 먹의 운용 방식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동양 회화에서 화가의 내면과 개성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요소입니다.
겸재의 화풍이 단계적으로 변화한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36세 이전: 중국 화보를 충실히 따르는 모방 단계
- 36~50세: 금강산 유람을 기점으로 진경산수화의 기초를 확립하는 단계
- 50~60세: 필운대, 남산 등 생활 주변의 실경을 정직하게 담아내는 성숙 단계
- 60세 이후: 불필요한 것을 생략하고 필묵의 리듬으로 표현하는 원숙 단계
70대 이후, 진짜 대가의 경지
표암 강세황이 겸재의 작품을 두고 "산과 돌이 참하고 기이하다"며 "새로운 필치와 묵법"이라고 극찬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65세에 양천 현령으로 부임한 후 5년간이 겸재 예술의 최고조였다면, 70세 이후는 그 정점 위에 또 다른 경지가 펼쳐지는 시기였습니다.
제가 겸재의 노년 작품 앞에서 가장 놀랐던 순간은 72세에 그린 금강전도(金剛全圖)를 처음 봤을 때입니다. 이 작품은 회상에 기반해 그린 그림임에도 구도와 경영(經營)에서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보여줍니다. 경영이란 그림의 구성과 배치를 계획하는 것, 즉 화면을 설계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실경에 얽매이지 않고 금강산 정양사 방광대에서 본 시각을 바탕으로 전체 지형을 개념적으로 재구성했는데, 어떤 면에서는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이 대상의 본질을 재해석한 방식과 닮아 있다고 느꼈습니다.
만폭동 그림에서는 물소리가 들리는 듯한 역동적인 붓질이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우고, 금강대 그림에서는 망원 렌즈로 클로즈업한 듯한 대담한 구도와 단목(丹木) 채색이 시선을 압도합니다. 단목 채색이란 붉은 계통의 채색을 절제되게 올려 화면에 긴장감과 생동감을 동시에 부여하는 기법입니다.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는 겸재가 76세에 그린 작품으로, 비 온 뒤 인왕산의 윤기 있는 모습을 힘찬 필치와 중첩된 먹으로 표현해냈습니다. 이 그림에서 조선의 성곽을 화면 하단에 살려 조형의 힘을 극대화한 방식은, 단순한 풍경화를 넘어서 조선의 공간과 역사를 화면 안에 압축해 넣은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따르면 인왕제색도는 조선 시대 진경산수화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공식 분류되어 있습니다.
77세 무렵에 그린 비 내리는 풍경과 까마귀를 담은 작품에서는 떠나고 싶은 노인의 마음이 읽힙니다. 두 자루 붓을 쥐고 새끼를 꼬듯 소나무 군락을 그리던 독특한 습관, 선면화(扇面畫)에서 보여주는 완벽한 구도의 안정감, 통천문함과 비로봉 그림에서 극도로 생략된 선묘(線描)만으로 맛을 내는 경지. 이것들이 모두 한 사람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이 지금도 실감 나지 않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겸재 정선을 "조선 후기 회화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화가"로 규정하며, 그의 진경산수화가 이후 강세황, 단원 김홍도로 이어지는 조선 후기 회화의 흐름을 만들어냈다고 평가합니다.
겸재의 예술을 보고 나면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84세까지 붓을 놓지 않은 사람이 남긴 것은 단순히 그림이 아니라, 우리 산천을 우리 눈으로 보겠다는 태도 그 자체였습니다. 겸재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면 인왕제색도나 금강전도 한 작품만이라도 실물 크기의 도판으로 천천히 들여다보시기를 권합니다. 화면 속 붓질의 리듬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순간, 300년의 거리가 생각보다 훨씬 가깝다는 걸 알게 되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