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추상화 앞에서 늘 당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뭘 봐야 하는지 몰라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쳤죠. 그런데 박서보 화백의 단색화를 처음 마주한 날, 뭔가 달랐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고요함이 먼저 찾아왔습니다. 이 글은 그 경험에서 출발합니다.

묘법, 그림이 아니라 수행이라는 주장에 대해
박서보 화백의 작업 방식을 설명할 때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묘법(描法)입니다. 프랑스어로는 에크리튀르(Écriture)라고도 불리는데, 여기서 에크리튀르란 단순히 '쓰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 자체가 곧 존재가 되는 과정을 뜻합니다. 캔버스 위에 무언가를 완성하는 게 아니라, 반복되는 행위를 통해 자아를 지워나가는 일종의 수행(修行)에 가깝습니다.
1970년대 초기 묘법이 특히 그렇습니다. 물감이 채 마르기 전에 연필로 캔버스를 수천 번 긋는 이 방식을, 어떤 분들은 단순 반복 작업에 불과하다고 보기도 합니다. 저는 그 의견이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처음 봤을 때 저도 그랬으니까요. 그런데 직접 눈앞에서 작품을 오래 들여다보고 나서야 달리 느껴졌습니다. 그 선 하나하나에 쌓인 시간의 무게가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박서보 화백은 193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한국 전쟁 직후의 폐허 속에서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진학했습니다. 그 시대적 상처가 이 집요한 반복 행위와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묘법은 단순한 기법이 아니라, 전쟁 이후 무너진 내면을 다스리는 방식이었을지 모릅니다.
초기 묘법을 감상할 때 핵심 포인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 완성된 이미지가 아니라 반복된 행위의 흔적을 찾을 것
- 선의 방향과 밀도가 일정하지 않은 부분에서 화백의 호흡을 읽을 것
- '무엇을 그렸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지워냈는가'를 생각할 것
물성, 한지가 캔버스의 뼈대가 된 순간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 묘법은 극적으로 달라집니다. 이때부터 박서보 화백은 물에 흠뻑 불린 전통 한지를 캔버스에 올리고, 손가락이나 도구로 그 축축한 종이를 밀어내는 방식을 씁니다. 이를 후기 묘법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물성(物性)이란 재료 자체가 갖는 고유한 성질과 질감을 의미합니다. 한지라는 재료가 단순한 바탕이 아니라 작품의 구조 자체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 변화를 단순히 기법의 진화라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밀려난 한지 결이 만들어내는 입체감은 사진으로는 절대 전달이 안 됩니다. 실물 앞에 서서 몸을 조금 기울이면, 빛과 그림자가 달라지면서 평면이 숨을 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순간이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한국 국립현대미술관(MMCA)은 단색화 운동을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성을 정립한 핵심 흐름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박서보 화백의 후기 묘법이 이 운동의 미학적 완성도를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후기 묘법에서 한지를 쓴 것은 재료의 선택이 곧 철학적 선언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서양의 캔버스 회화가 재료를 '지우고' 그 위에 이미지를 올리는 방식이라면, 박서보 화백은 재료를 '드러내고' 그것 자체를 작품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차이가 단색화를 서양 미니멀리즘과 구분짓는 핵심입니다.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란 불필요한 요소를 최대한 제거하여 본질에 집중하는 예술 경향인데, 단색화는 그 출발점이 동양의 수행 철학에 있다는 점에서 결이 다릅니다.
치유, 예술이 흡수지가 된다는 말의 의미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묘법은 또 한 번 변합니다. 무채색 일변도에서 벗어나 단풍의 붉은빛, 맑은 하늘의 파란빛 같은 자연의 색이 캔버스 안으로 들어옵니다. 이를 유채색 묘법이라고 부릅니다. 색채 심리학(Color Psychology) 관점에서 이 변화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색채 심리학이란 색이 인간의 감정과 심리 상태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분야입니다. 자연에서 온 색은 인간의 신경계를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박서보 화백이 남긴 "예술은 인간의 고통을 흡수하는 흡수지여야 한다"는 말이 이 시기 작품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구현됩니다. 초기에는 자기 자신을 비우는 일에 집중했다면, 후기로 갈수록 시선이 바깥을 향합니다. 내 고통을 다스리는 수행에서, 당신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치유로 이동한 겁니다.
이 변화를 단순히 상업적 판단이라고 보는 분들도 있습니다. 색이 들어오니 대중에게 더 친근해졌고, 시장에서도 반응이 좋았으니까요. 저는 그 해석이 아예 틀린 건 아니지만, 화백이 2021년 금관문화훈장을 수상하기까지 50년 넘게 일관되게 유지한 철학적 맥락을 빼놓으면 절반만 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의 치유적 기능에 관해서는 학술적으로도 근거가 축적되어 있습니다. 미술을 활용한 심리 치료 효과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반복적인 시각 자극이 스트레스 완화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결과들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유채색 묘법 앞에 서면, 사실 아무 생각도 안 해도 됩니다. 제 경험상 그냥 오래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설명을 알고 보면 더 깊이 보이지만, 모르고 봐도 뭔가 가라앉는 느낌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화백이 의도한 것이겠죠.
추상화 앞에서 멍해졌던 저처럼, 박서보 화백의 작품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은 하나입니다. 이해하려 하지 말고 그냥 머물러 보라는 겁니다. 묘법은 화백이 수천 번 선을 그으면서 자기를 비워낸 흔적입니다. 그 앞에서 잠시 멈추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 작품과 충분히 대화하고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