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면, 저는 국내 여행보다 해외여행을 더 챙겨 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유홍준 교수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이야기를 접하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이렇게 실감 나게 와닿은 적이 없었습니다. 무심코 지나쳤던 절터 하나, 돌담 하나에 이렇게 깊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는 걸 그때야 처음 알았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문화유산,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저도 처음엔 '문화유산답사기'라는 책 이름만 들으면 왠지 따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목에서부터 교과서 냄새가 풍기잖아요. 그런데 막상 내용을 들여다보니 전혀 달랐습니다. 1993년 초판 출간 이후 한국 최초의 논픽션 밀리언셀러가 된 이 책은, 단순한 여행 안내서가 아니라 우리 땅에 담긴 미학을 일반인의 눈높이에서 풀어낸 책이었습니다.
유홍준 교수님이 이 책의 서문에서 밝힌 핵심 문장이 있습니다.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다르다. 훈련되지 않은 눈에는 잘 보이지 않으며, 감상할 수 있을 만큼 알아야 한다." 이 문장을 읽고 나서, 제가 그동안 얼마나 눈 뜨고도 못 보고 지나쳤는지 부끄러워졌습니다.
여기서 미학(aesthetics)이란, 아름다움의 본질과 예술적 경험을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쉽게 말해 '어떻게 아름다움을 느끼고 이해하는가'에 대한 공부인데, 문화유산을 볼 때 이 훈련이 되어 있으면 같은 돌탑을 보고도 전혀 다른 감동을 받게 됩니다. 제가 직접 경험해보니 이게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배경 지식 없이 갔을 때와, 공부하고 갔을 때의 감동이 정말 달랐습니다.
현재 문화재청은 우리나라 주요 문화유산에 대한 정보를 온라인으로도 제공하고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유적지에 대한 상세 자료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출처: 문화재청).
석굴암 돔 구조와 불국사 그랭이 기법, 직접 보면 다르다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은 반드시 세트로 가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저는 그게 그냥 관광지 패키지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알고 나니 두 곳은 하나의 건축 철학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불국사에서 가장 먼저 눈여겨봐야 할 것은 사찰 기단부(基壇部)입니다. 기단부란 건물의 하단을 받치는 토대 구조물을 의미합니다. 불국사는 토함산 기슭이라는 경사진 지형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자연석과 다듬은 판석을 교차로 쌓아 지반을 평평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때 사용된 기법이 '그랭이 기법'인데, 울퉁불퉁한 자연석 위에 판석을 올릴 때 돌의 면을 일일이 맞춰 깎아내어 틈 없이 맞물리게 하는 전통 석조 기술입니다. 시멘트 한 줄기 없이 돌과 돌이 맞물려 지진에도 흔들리지 않는 구조를 만든 것입니다. 제가 이 설명을 듣고 나서 불국사 기단 사진을 다시 찾아보았는데, 그제야 그 정교함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석굴암은 더 놀라웠습니다. 많은 분들이 석굴암을 바위를 파서 만든 동굴로 알고 계신데,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석굴암은 돌을 다듬어 조립한 인공 돔(dome) 구조물입니다. 돔 구조란 반구형 천장을 돌이나 벽돌을 맞물려 쌓아 올리는 건축 방식으로, 내부에 기둥 없이도 넓은 공간을 지탱할 수 있습니다. 통일신라 시대에 이 기술을 사용했다는 것 자체가 놀랍습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이 돔 구조를 해체했다가 다시 조립하지 못하고 콘크리트로 덮어버리는 일이 있었고, 그 결과 자연 환기가 차단되어 지금도 냉방 시스템으로 온습도를 관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원래 설계대로라면 바닥의 차가운 샘물이 자연적으로 결로(結露)를 방지했다는 사실이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결로란 따뜻한 공기가 차가운 표면에 닿아 수분이 맺히는 현상인데, 신라 장인들은 그 원리를 이미 알고 설계에 반영했던 겁니다.
유네스코는 불국사와 석굴암을 199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였으며, 이는 한국의 독창적인 건축 기술과 예술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결과입니다(출처: 유네스코 세계유산).
전라도 강진부터 백제 유적까지, 아이 손 잡고 떠날 코스
저는 요즘 아이를 데리고 다닐 국내 여행지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해외에 데려가는 것도 좋지만, 우리 땅의 역사를 먼저 알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이에게 설명해주려면 부모가 먼저 알아야 하는 법이라, 공부를 시작한 게 이번 계기가 됐습니다.
유홍준 교수님이 추천하는 코스 중에서 가족 여행으로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온 곳은 전라남도 강진이었습니다. 무위사(無爲寺)라는 절이 있는데, 이름 그대로 '행함이 없는 집'이라는 뜻을 가진 사찰입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초라하지도 않은, 딱 그 중간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가진 공간이라고 하더군요. 여기에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인 다산초당까지 이어지는 코스는, 아이에게 역사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풀어주기에 더없이 좋은 루트로 보였습니다. 정약용이 유배 생활 18년 동안 쓴 저작물이 500권이 넘는다는 사실, 아내가 보내준 붉은 치마를 잘라 책을 만들고 딸을 위해 매조도를 그렸다는 이야기는 어른이 들어도 가슴이 먹먹해지는데, 아이들에게는 더 깊이 남을 것 같습니다.
유홍준 교수님이 선정한 BEST 4 코스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전라남도 영암·해남·강진 (무위사, 다산초당, 김영랑 생가)
- 경주 불국사·석굴암 (그랭이 기법, 인공 돔 구조)
- 영주 부석사·안동 병산서원 (외국 건축가들도 감탄한 한국 건축)
- 백제 역사 유적 지구 (공주·부여·익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8개소)
네 번째 코스인 백제 역사 유적 지구는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으로, 공주 공산성과 왕릉, 부여 정림사지와 부소산성, 익산 미륵사지 석탑 등 총 8개 유적이 포함됩니다. 미륵사지 석탑은 현존하는 한국 최대 규모의 석탑으로, 백제 석탑 양식(百濟石塔樣式)의 정수를 보여주는 건축물입니다. 백제 석탑 양식이란 목조 건축의 구조와 형태를 돌로 구현한 독자적인 한국 석탑의 초기 형식으로, 이후 신라·고려 석탑 양식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BTS 공연 이후로 외국인 관광객이 눈에 띄게 늘었다는 건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경복궁이나 명동만 보고 돌아가는 게 아니라, 이런 유적지들까지 찾아온다면 우리나라를 더 깊이 알고 가실 텐데 싶습니다. 우리가 먼저 우리 땅을 제대로 알아야 소개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우리나라 안에 아직 가보지 못한 좋은 곳이 이렇게 많다는 게 새삼스럽게 느껴집니다. 저처럼 '국내 여행은 좀 밋밋하지 않을까' 싶었던 분이라면, 한 번쯤 배경 지식을 먼저 채우고 떠나보시길 권합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스러워지는 곳들이 전국 곳곳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