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라는 단어, 한국 사람이 만든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저도 민화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전까지는 그냥 우리 전통 그림의 총칭이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파고들수록 이 단어 하나에 일제강점기의 흔적, 조선 서민의 미감, 그리고 88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까지 전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민화의 기원부터 기능까지, 데이터와 기록을 근거로 짚어보겠습니다.

"민화"라는 이름은 누가, 왜 붙였을까
저는 1990년대 초 대학 4학년 때 처음 민화 책을 손에 들었습니다. 그때 책을 펼치자마자 든 생각은 분석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색이 너무 예쁘다"였습니다. 전통 회화에서 보던 절제된 먹빛이 아니라, 청색과 적색, 황색이 뒤섞인 화면이 눈을 꽉 채웠거든요. 그 책 제목에 "민화"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는데 그 단어가 어디서 왔는지는 한참 뒤에야 알았습니다.
"민화(民畵)"라는 명칭은 일본인 미술사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1922년 저서 《조선과 그 예술》에서 처음 대중에게 소개했습니다. 여기서 야나기 무네요시란 1900년대 초반 조선을 직접 방문하여 민속품과 회화를 수집하고 연구한 인물로, 민예운동(民藝運動)을 주도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민예운동이란 공장제 대량생산이 아닌 민중의 손에서 태어난 일상 공예품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고자 한 예술 사상 운동을 말합니다.
야나기는 조선의 그림들을 들여다보며 작가의 낙관(落款)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여기서 낙관이란 그림이나 글씨 작품에 작가가 자신의 이름과 도장을 찍어 저작을 증명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는 "민중에게서 태어나, 민중을 위해, 민중이 사들이는 그림"이라는 개념으로 이 무명의 그림들을 묶어 민화라고 불렀습니다. 현재 학계에서는 이 명칭이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라는 이유로 결의화, 한얼화, 우리 그림 등 대안 명칭을 제안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아직까지 민화라는 단어가 가장 널리 통용되고 있습니다.
민화의 기원,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가
민화의 기원을 어디에 두느냐는 연구자마다 의견이 크게 갈립니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岩刻畵)에서 찾는 시각도 있고,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신도(四神圖)에서 찾는 시각도 있습니다. 사신도란 동서남북 네 방위를 지키는 상상 속 동물, 즉 청룡·백호·주작·현무를 그린 벽화를 말합니다. 범위를 이렇게 넓히면 민화의 역사가 수천 년으로 늘어납니다.
그런데 저는 이 관점이 실용적이지 않다고 봅니다.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지면 공부를 시작하는 분들에게 오히려 혼란을 줍니다. 저도 수업을 15년 가까이 진행하면서 이 문제를 자주 마주쳤습니다. 그래서 저는 좁은 의미의 민화를 기준으로 삼고, 조선 말기인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 구한말까지를 민화의 핵심 시기로 봅니다.
이 시기를 뒷받침하는 문헌 기록이 있습니다. 19세기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이 편찬한 백과사전 형식의 저술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우리나라 여염집에는 병풍과 족자, 벽에 속화(俗畵)가 붙여진다"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속화란 민화의 옛 명칭으로, 민간 생활 풍속을 담은 그림이라는 뜻입니다. 이 기록은 민화가 조선 후기 서민의 일상 공간에 실제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구체적인 문헌 증거입니다. 같은 시기 시인 강이천(姜彛天)의 시 〈한경사(漢京詞)〉에도 광통교 일대에서 그림이 거래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광통교 근처가 지금의 인사동입니다. 조선 시대에도 그 자리에서 그림을 팔았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호돌이와 민화 부흥, 그 연결고리
민화가 일반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1988년 서울 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입니다. 이 연결고리를 처음 알았을 때 저도 적잖이 놀랐습니다. 호돌이의 뿌리를 따라 올라가면 민화의 대표 소재인 까치와 호랑이 그림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배경에는 민속학자 조자용(趙子庸, 1926~2000) 박사가 있습니다. 그는 해방 이후 미군부대 근무를 거쳐 미국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귀국한 뒤, 새마을운동의 물결 속에서 사라져가던 민속품 수집에 나섰습니다. 경주 보문단지 개발 현장에서 도깨비 문양 기와 파편 약 1,000점을 모았다는 일화는 그의 열정을 잘 보여줍니다. 특히 그는 민화 속 호랑이와 까치 도상을 집중적으로 수집하고 여러 학회에서 발표하며 이 소재의 미학적 가치를 알렸습니다. 그의 제자 중 한 명이 디자이너로 활동하다가 올림픽 마스코트 공모에 참여해 까치와 호랑이에서 영감을 얻은 호돌이를 디자인했고, 이것이 채택되었습니다.
그 이후 민화 인구는 꾸준히 늘었습니다. 2019년에서 2021년 사이 3년 동안 민화를 배우는 인구가 약 3배 이상 증가했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 인사동에 가면 언제든지 서너 곳의 갤러리에서 민화 전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국내 민화 관련 현황은 문화체육관광부가 발간하는 공예·문화산업 통계에서도 일부 확인할 수 있습니다(출처: 문화체육관광부).
민화의 세 가지 기능, 지금도 유효한가
민화의 기능을 이해하면 왜 현대인들이 다시 민화에 끌리는지 납득이 됩니다. 민화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핵심 기능은 세 가지입니다.
- 기록의 기능: 카메라가 없던 시대에 도화서(圖畫署) 화원들은 궁중 행사를 그림으로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도화서란 조선시대 그림에 관한 일을 담당하던 관청으로, 전문 화원을 소속 인원으로 두었습니다. 평양감사 행차도나 외규장각 전서 도설 같은 작품이 이 기능의 대표 사례입니다.
- 교화의 기능: 문자도(文字圖)가 대표적입니다. 문자도란 효(孝)·제(悌)·충(忠)·신(信) 같은 유교 덕목을 글자와 그림으로 결합한 민화 장르입니다. 다음 세대에 가치관을 전달하는 시각적 교육 매체로 기능했습니다.
- 오락의 기능: 십장생도, 화조화, 어해도 같은 길상(吉祥) 그림들은 보는 이에게 미적 쾌감과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길상이란 좋은 징조, 즉 복과 장수를 기원하는 상징적 의미를 담은 것을 말합니다.
제가 처음 민화 책을 폈을 때의 감각이 바로 이 세 번째 기능이었습니다. 분석도, 공부도 아니고 그냥 색이 예뻐서, 마음이 편해져서 손이 갔습니다. 그 경험이 민화 공부의 출발점이 되었고, 지금도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먼저 그냥 보세요"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의 무형문화 전승 현황과 관련된 상세 자료는 국립무형유산원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출처: 국립무형유산원).
민화는 아직도 정의가 완성되지 않은 현재진행형 장르입니다. 영모화(翎毛畵), 화조화(花鳥畵), 문자화(文字畵), 기록화처럼 소재별로 분류하는 방식도 있지만, 저는 그보다 "창조되고 향유되고 전승되는 생활 문화의 시각화"라는 기능적 정의가 더 실용적이라고 봅니다. 민화를 처음 접하시는 분이라면 분류 체계보다 먼저 실제 그림을 눈으로 보시길 권합니다. 어느 순간 색이 마음으로 들어오는 그 느낌, 그게 민화가 수백 년째 살아남은 이유일 것입니다.